약속
어느 폐건물, 양아치 같은 패거리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진성호는 이 상황이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이미 저 패거리들은 얼어붙은 채로 자신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 승리의 말들 따위를 듣고 있어야 하는데. 패거리, 그러니까 자신이 엿을 먹여서 복수하러 온 이들은 어수선하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계하고 있으며 그들보다도 더욱 긴장한 채로 서있다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원인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이능력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 내 말을 안 듣겠다고?”
“내가 저들을 어떻게든 해주길 원하면, ‘뭐든’ 해준다고 약속해.”
“지금까지는 해줬잖아! 능력이 먹힌 채 연기했던거야?! 왜?”
“왜라고 생각해?”
왜긴 왜야 나 엿먹이려고겠지…. 반대편에서 ‘역시 쟤 능력이 저정도는 아니라니까’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열이 확 뻗쳤다. 이새끼들이 날 무시해? 진성호는 결국 근미래에는 후회하지만 결국에는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뭐든 해줄테니까 저것들 조져줘!”
“뭐든.”
“알았으니까!”
반대편에서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도망쳐! 같은 소리를 냈지만, 그보다 더 우수한 이능력이 그들을 멈추게 했다. 도망치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버린 패거리들을 바라보면서 그제서야 진성호는 아까 냈어야 했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얼음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니까 누가 여러명이서 한명을 괴롭히래? 문제가 하나 해결 됐다. 그래, 하나. 저기서 빤히 쳐다보는 S급 이능력자가 또다른 문제다. 일이 왜이렇게 됐지? 다른 사람이 보면 업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고 진성호도 그걸 떠올리고는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이게 내 잘못이라니! 그래서 일이 왜 이렇게 됐냐면….
B급 이능력자 진성호의 능력은 정신안정이다. 정신계 능력은 귀해서 원래도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이게 C급 가이드 정도의 가이딩 효과가 난다고 밝혀진 이후부터는 더욱 위상이 올라갔다. 현장에서 급한 가이딩 용도로 쓰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이 이능력자 사회에 도움 되는 능력이었다. 문제는, 한 사람에게 능력을 세게 쓰면 그게 세뇌랑 비슷한 효과가 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진성호는 그걸 참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고. 그 뒤로 만만하고 능력이 통하는 녀석들에게 세뇌를 걸고 웃긴 짓이나 수치스러운 짓을 시킨 후 풀어주는 걸 반복했다. 물론 그 일로 몇 번 불려가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벌을 주거나 능력에 제약을 주기 보다 현장에 가기 싫어하는 진성호를 강제로 현장에 보내는 게 더 이득이었고 그렇게 그에게 당하는 이들만 늘어났다. 하지만 결국 당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복수할 인원도 늘어난다는 뜻. 궁지에 몰린 진성호는 마침 눈 앞에 보이던 S급 이능력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를 세뇌했다. 세뇌는 먹혔고 복수 하려던 이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며 진성호는 그렇게, 류건우를 손에 얻은 줄 알았다. …일주일 정도.
일주일 동안 특별한 걸 하진 않았다. 그냥 좀, 자랑? 내 능력이 이렇게 뛰어나다? 이 일로 능력 재검사를 했을 때 여전하다는 걸 듣고 정신차렸어야 했는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진성호는 자신의 상황, 이 문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나이 차이가 나는데 해봤자 무얼 시키겠는가. 결국 며칠 가다가 질려서 버리겠지, 젊으니까.
“말한대로 뭐든 들어줄게. 뭘 원하는데?”
“일단 이동할까.”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진성호의 예감은 100% 빗나갔다. 처음에는 섹스하는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언제까지 했는지 기억이 안 날정도로 하게 되는 건 좀 힘들었고, 그걸로 늦잠을 자거나 해서 결국 며칠을 그 집에서 못나가다가 겨우 현장 파견을 핑계로 나올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가이딩을 해보라길래 나는 가이드가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결국 능력을 쓰면서 몸을 섞기 시작했다. 며칠 해보니까 그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은, 편해진 듯 했다. 그냥 가서 가이드 몇명 붙잡고 하라고 했더니, 대답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렇게 제법 가까이 지내다보니까 정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이 신경쓰여서 일까? 자신을 내치지 않고 계속해서 데리고 있어서? 진성호는 어느샌가 자연스레 돌아갈 곳이 건우의 집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욕심인 걸 알면서도 정말로 갖고 싶어졌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는 살짝 구겨진 미간이, 자신의 능력이 닿으면 풀어지는 게 좋다. 무심한 듯 보여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시선이, 가까이 가면 어느새 품에 안아주는, 괜히 우리 사이에 관계를 갖고 싶어서 장난스레 불렀던 아들이라는 말에 아버지, 라고 불러주는 목소리가, …류건우가 갖고싶어졌다.
현장. 진성호는 자신의 이능력의 조건이 접촉임을 요 며칠 사이 꽤 불편해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오늘은 같이 현장에 나왔으니 같이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가이드들 사이에서 건우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게 당연한데도 그날따라 참을 수 없었다. 충동은 이미 나가있는 이능력자들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의 무전기를 빼앗았고 곧.
“아들, 아직 멀었어? 너무 많이 해서 입 아픈데.”
무전기를 빼앗기고 개인적으로 무전을, 그런 이유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들을 듣고 주위에서 요즘 얌전하다 했다며 싸늘한 시선을 받아도 상관 없었다. 그저 오로지, 네가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서 정신이 없었다. 정신이 그나마 똑바로 잡힌 건 다가와서 자신의 몸을 붙잡는, 이제는 확실히 읽을 수 있는 표정에서 불만을 읽어냈을 때. 가이딩용으로 준비 된 곳으로 거친 손길을 따라 끌려가는 동안,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는 걸 언젠가 네게 말할 수 있을까. 더이상 그곳에서 할 수 없어서 건우에게 안긴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잠에 취한 채 목을 좀 더 힘을 줘 끌어안으며 처음 건우를 만났을 때 능력을 사용하며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내 편이 되어줘.”
“…그래.”
그 날과 똑같은 대답.
“이번에는 중간에 … 깨면 안돼.”
능력을 쓰지 않았으니까, 더 확실한 약속을.
“알겠어.”
새로운 대답을 듣고 만족한 채로 진성호는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여전히 이 약속이 이어져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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