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텔루츠] 내 천사님
모르포
25-09-03 04:11
3
인류의 앞날을 결정하는 내기는 악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인류의 멸망이란 숨을 쉬면 죽는 독가스가 퍼진 것도, 모든 도시가 물에 잠기는 것도, 화산이 폭발해 녹아내리는 것도, 땅이 갈라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 오로지 인류를 막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종종 멸망을 그리던 자들이 말하던 멸망. 선한 자들은 죽어가며 악한 자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워버려 결국에는 모두, 사라질 것이란. 그래, 이미 지상은 인류가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던 지옥의 모습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게 내기에 진 인류의 결말이었다.
에텔루츠는, 신을 믿고 따르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고 기도했으나 세상이 그를 비웃듯 서있는 곳을 지옥으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따랐기 때문인지, 신은 그를 버리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줬다.
“에텔.”
“네, 블랙.”
시선을 돌리면 하얀색이, 그리고 곧 분홍색이 눈에 가득 담겼다. 그 모습을 보면 감정을 제어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평생 해왔던 연기가 금방 녹아내려 흐물흐물 웃는 얼굴로 표정을 보이기 싫어 팔을 벌려 끌어안으면 ‘잠깐, 에텔!’ 하는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결국 밀어내지 못하고 마주 끌어안는 팔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인류의 앞날을 결정하는 내기를 하는 곳에서 만난 이였다. 사람이 갖고 싶어 졌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놀랬던지. 그래서 또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을 놀리려고 신부인 척을 하는 악마인 줄 알았다. 물론, 악마가 아니었다. 그리도 신성한 이름을, 라파엘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악마일리가.
내기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인해 욕망을 탐하게 되었을 때 ‘악마’가 아닌 그에게로 달려들었을 때의 경험이 아직도 앞에 그려질 정도다. 눈을 씹어 삼키고, 손을, 배를 가르고, 그 안을 씹어 삼켰던. 울고 빌며 자신의 품 안에 안겨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팔다리가 잘린 채로 자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했을 때의 라파엘. 그 때 그대로 나왔다면 지금 이렇게 바깥에서 같이 걷진 못했을테지. 남들에게 그를 보여줄 필요도 없었을 거고, 옆에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이유로 이사를 오지도 않았을거다. 오로지 햇빛 조차 비치지 않는 방의 침대에 누운 채로 공허한 눈을 하고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정말,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거예요?”
“제게 입을 맞춰주실 때까지?”
바깥이라는 걸 의식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정말 그의 색이 소동물과 닮아 머리 위에 정말 귀가 달려있지 않나 확인하듯 머리를 쓸어본다. 그저 부드러운 머리카락만 손에 감길 뿐이지만. 곧 입술에 닿는 작은 온기에 아쉬운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 떨어지면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걸 따라 걸었다. 자신의 망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이루지 않을 거다. 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를 강제로 자신의 곁에 떨어트리는 것도 물론 나쁘지 않을 테지만 오히려 그런 존재일 수록 원하지 않는가, 스스로, 날개를 꺾어 나락으로 떨어지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걸 말하는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할 정도인데, 실제로 보게 될 때는 어떨지. 그렇기에 이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다. 자신은 인류가 멸망한 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구원할 천사를 만났으며 지금도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으니.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같이 걷고 집안으로 들어와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는 일상.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이었던 전과 달리 둘이 살고 있는 제법 소란스러운 공간. 새삼스럽게 이 공간에서 얻는 안정감에 대해 생각하며 먼저 소파에 앉아있는 블랙의 무릎에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대고 누우면 모든 게 완벽…… 했으나.
“요즘은, 또래 신부들과 만나러 가지 않네요.”
“아—.”
제법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블랙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배에 파묻으면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꼈다. 정말, 어느 순간 뜬금없이… 뭐라고 했더라. 나이에 맞는 사람과 어울려야 하지 않냐고? 그리 말했던 적이 있다. 나이차가 많긴 하지만 이미 멸망한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도 꽤나 걱정스러워 하는 모습에 몇 번 자신의 또래들이 모이는 모임에 나가 얼굴만 비친 적이 있었다. 곧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너무 빼앗기는 것만 같아서 그만뒀지만.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다른 사람과의 연을 끊으라 종용하는 이들은 삶에 넘치도록 많았지만 누군가와 어울리라고 들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니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서.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입 안에서 뱉을 말을 정리했다.
“나갈 거예요. 걱정말아요, 블랙.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으니까.”
“아, 그….”
이게 정답이 아니었나. 배에만 묻어두던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에 잠깐 기다리면.
“가지말고 저랑, 좀 더... 있어주세요.”
드디어 악몽이 끝나고 제대로 된 꿈을 꾸기 시작했나 싶을 정도로 듣고 싶었던 말이 들려 눈을 깜빡이는 걸로 답을 잠시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웃음을 참기 어려워진다니까. 상체를 일으켜 일어나 끌어안으면 더욱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이 기분 좋았다.
“블랙, 내 천사님.”
“조금, 아직은... 겁이 나요. 이렇게 욕심을 내는 게, 에텔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을 빼앗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저는 블랙이 욕심 내줄 수록 좋은데, 더 해줬으면 좋겠어요. 블랙, 이제 당신이 없는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걸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 애정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앞으로도 결국 그의 곁에 있을 건 자신이니까. 그러니 조금은 참고 있던 욕심을 풀어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졌다. 고작 그가 조금 자신을 탐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참지 못하고 얻고 싶어졌으니. 내 천사님, 그 날개를 검게 물들이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의 곁에는.
“우리, 결혼할까요? 내일은 반지를 맞추러 가고, 모두가 당신과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알리죠. 다음에는, 아이를 가져도 괜찮을 거고, 멀리 여행을 떠나도 좋겠네요.”
세상은 멸망했지만, 에텔루츠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구원할 이가 눈 앞에 있으며, 곧 이 곳은 그의 천국이 될 테니까.
에텔루츠는, 신을 믿고 따르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고 기도했으나 세상이 그를 비웃듯 서있는 곳을 지옥으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따랐기 때문인지, 신은 그를 버리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줬다.
“에텔.”
“네, 블랙.”
시선을 돌리면 하얀색이, 그리고 곧 분홍색이 눈에 가득 담겼다. 그 모습을 보면 감정을 제어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평생 해왔던 연기가 금방 녹아내려 흐물흐물 웃는 얼굴로 표정을 보이기 싫어 팔을 벌려 끌어안으면 ‘잠깐, 에텔!’ 하는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결국 밀어내지 못하고 마주 끌어안는 팔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인류의 앞날을 결정하는 내기를 하는 곳에서 만난 이였다. 사람이 갖고 싶어 졌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놀랬던지. 그래서 또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을 놀리려고 신부인 척을 하는 악마인 줄 알았다. 물론, 악마가 아니었다. 그리도 신성한 이름을, 라파엘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악마일리가.
내기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인해 욕망을 탐하게 되었을 때 ‘악마’가 아닌 그에게로 달려들었을 때의 경험이 아직도 앞에 그려질 정도다. 눈을 씹어 삼키고, 손을, 배를 가르고, 그 안을 씹어 삼켰던. 울고 빌며 자신의 품 안에 안겨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팔다리가 잘린 채로 자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했을 때의 라파엘. 그 때 그대로 나왔다면 지금 이렇게 바깥에서 같이 걷진 못했을테지. 남들에게 그를 보여줄 필요도 없었을 거고, 옆에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이유로 이사를 오지도 않았을거다. 오로지 햇빛 조차 비치지 않는 방의 침대에 누운 채로 공허한 눈을 하고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정말,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거예요?”
“제게 입을 맞춰주실 때까지?”
바깥이라는 걸 의식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정말 그의 색이 소동물과 닮아 머리 위에 정말 귀가 달려있지 않나 확인하듯 머리를 쓸어본다. 그저 부드러운 머리카락만 손에 감길 뿐이지만. 곧 입술에 닿는 작은 온기에 아쉬운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 떨어지면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걸 따라 걸었다. 자신의 망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이루지 않을 거다. 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를 강제로 자신의 곁에 떨어트리는 것도 물론 나쁘지 않을 테지만 오히려 그런 존재일 수록 원하지 않는가, 스스로, 날개를 꺾어 나락으로 떨어지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걸 말하는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할 정도인데, 실제로 보게 될 때는 어떨지. 그렇기에 이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다. 자신은 인류가 멸망한 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구원할 천사를 만났으며 지금도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으니.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같이 걷고 집안으로 들어와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는 일상.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이었던 전과 달리 둘이 살고 있는 제법 소란스러운 공간. 새삼스럽게 이 공간에서 얻는 안정감에 대해 생각하며 먼저 소파에 앉아있는 블랙의 무릎에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대고 누우면 모든 게 완벽…… 했으나.
“요즘은, 또래 신부들과 만나러 가지 않네요.”
“아—.”
제법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블랙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배에 파묻으면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꼈다. 정말, 어느 순간 뜬금없이… 뭐라고 했더라. 나이에 맞는 사람과 어울려야 하지 않냐고? 그리 말했던 적이 있다. 나이차가 많긴 하지만 이미 멸망한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도 꽤나 걱정스러워 하는 모습에 몇 번 자신의 또래들이 모이는 모임에 나가 얼굴만 비친 적이 있었다. 곧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너무 빼앗기는 것만 같아서 그만뒀지만.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다른 사람과의 연을 끊으라 종용하는 이들은 삶에 넘치도록 많았지만 누군가와 어울리라고 들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니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서.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입 안에서 뱉을 말을 정리했다.
“나갈 거예요. 걱정말아요, 블랙.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으니까.”
“아, 그….”
이게 정답이 아니었나. 배에만 묻어두던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에 잠깐 기다리면.
“가지말고 저랑, 좀 더... 있어주세요.”
드디어 악몽이 끝나고 제대로 된 꿈을 꾸기 시작했나 싶을 정도로 듣고 싶었던 말이 들려 눈을 깜빡이는 걸로 답을 잠시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웃음을 참기 어려워진다니까. 상체를 일으켜 일어나 끌어안으면 더욱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이 기분 좋았다.
“블랙, 내 천사님.”
“조금, 아직은... 겁이 나요. 이렇게 욕심을 내는 게, 에텔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을 빼앗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저는 블랙이 욕심 내줄 수록 좋은데, 더 해줬으면 좋겠어요. 블랙, 이제 당신이 없는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걸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 애정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앞으로도 결국 그의 곁에 있을 건 자신이니까. 그러니 조금은 참고 있던 욕심을 풀어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졌다. 고작 그가 조금 자신을 탐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참지 못하고 얻고 싶어졌으니. 내 천사님, 그 날개를 검게 물들이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의 곁에는.
“우리, 결혼할까요? 내일은 반지를 맞추러 가고, 모두가 당신과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알리죠. 다음에는, 아이를 가져도 괜찮을 거고, 멀리 여행을 떠나도 좋겠네요.”
세상은 멸망했지만, 에텔루츠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구원할 이가 눈 앞에 있으며, 곧 이 곳은 그의 천국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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