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텔루츠] 축복
모르포 25-09-03 04:12 3
악마들과 소수의 인간들만이 아는 사실이 있다. 이 세계의 결말은 종말뿐이다. 인간은 신을 선한 존재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새로 태어날 신은 악으로 물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날로부터 세계는 서서히 지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싸움이 늘었다. 전쟁이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어느 나라는 완전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은 제법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최근 계속되는 실종사건만 제외하면.

 골목으로 황급히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미 몸에는 여러 번 무언가에 찔린 상처로부터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는 소용없음을 알지만 상처를 꾹 누르면서 쫓아오는 누군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실종사건의 범인은 이놈이었다고 소리치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은 죽고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조용히 하세요. 쓸데없이 도망치느라 이미 지각했단 말이에요.”

 희망을 끊어낸 건 피로 녹슨 철로 된 꼬챙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도망치던 사람의 왼쪽 허벅지에 꽂혔고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로 앞으로 기어가려고 애를 썼지만 당연하게도 다친 곳이 없는 실종사건의 범인의 걸음이 더 빨랐고 등 위로 한쪽 발이 올라가는 것으로 짧은 추격전은 끝이 났다. 공포에 질린 신음, 비명, 원한에 가득 찬 응어리를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사람의 입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 혀를 뽑아낸 에텔루츠는 드디어 귀찮은 작업이 끝났음에 안도했다. 지금까지의 살인에서는 추격전이 이뤄지는 일이 없었다. 목표를 정해두고 정해진 시각과 장소에서 깔끔하게 처리해서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걸 선호했으니까. 지금 자신의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목표는 실종사건이 일어나는데 범인으로 자신이 의심된다며 시비를 걸어와 귀찮아지기 전에 처리하기로 했으나 당당하게 시비를 걸어온 것치고는 겁이 많은 게 문제였다. 피에 젖은 장갑을 벗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니 원래 돌아가려던 시간보다 30분은 더 지나있는 걸 확인하자 단순한 분풀이로 다리에 박아둔 꼬챙이를 눌러 더욱 깊게 상처를 쑤시면 죽음에 가까워지는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친구들에게 알리지 못한 게 퍽이나 아쉬운 모양이군요. 괜찮습니다. 필요한 심장의 수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거든요. 감히, 당신의 더러운 심장을 내 사랑에게 써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괜히 당신들이 나를, 블랙에게 관심을 가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

 몸을 강제로 뒤집고, 따로 챙겨 온 칼로 옷을 적당히 찢어버린 뒤 드러난 맨살 위에 피로 악마의 언어를 적기 시작했다. 이 자의 심장은 제물의 대상이 되며, 원하는 의식을 치를 때까지 신선도가 유지되는 마법. 마법이 온전히 깃들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자의 몸을 갈랐다. 살점과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고 다른 장기들을 뜯어내고 나면 마법의 효과로 인해 이미 몸을 가르는 순간에 숨이 멈췄음에도 따뜻하게 맥박을 이어가고 있는 심장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며 황홀감에 잠시 취해있으면 혹시 몰라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시체를 없애고 피를 씻고 옷을 갈아입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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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외곽에 위치한 보안을 신경 쓰고 또 신경 쓴 울타리와 대문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까까지의 상황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가정집이 에텔을 반겼다. 아직도 남아있던 혈향이 잊히고 포근한 집안의 향을 따라 외투를 벗으며 거실로 이동하면, 분명 나오기 전까지는 침대에 있는 걸 확인했건만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는 블랙의 모습에 바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몸에서 피 냄새가 나지 않는지, 어딘가에 피가 묻지 않았는지 점검한 뒤에 잠깐 떨어져 있었음에도 보고 싶었던 이름을 불러 잠에 든 이를 깨웠다. 

“블랙, 다녀왔어요.”

“……아, 에텔….”

 아직 잠에 취해 잠긴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 이의 이름을 부르고 눈이 아직 떠지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두 팔이 뻗어오는 걸 에텔은 팔 아래로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하는 몸을 끌어안아 올렸다. 부드럽게 자신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몸. 뻗어진 두 팔은 에텔의 몸을 감싸고 뺨은 목덜미로 향했다. 아주 가깝게 붙은 몸에서 들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으면 목덜미에 닿았던 뺨이 떨어져 흰색의 눈동자에 분홍색 눈동자가 완전히 담기며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에 서로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어서 와요, 에텔.”

“좋은 저녁이에요. 내 천사님. 좋은 꿈 꾸셨나요?”

“에텔이 나오는 꿈을 꾼 것 같아요.”

“음, 그건 좀 질투 나는 데….”

 짧게 퍼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맞추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다 보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행동이야 뻔했다. 침대로 갈 인내심은 이미 바깥에서 다 써버린 것처럼 입맞춤이 좀 더 길게 이어지는가 하면 혀를 얽는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잠옷의 단추를 풀고 입술에서 목으로, 아직 남은 어젯밤의 흔적들을 뒤덮거나 새로 자국을 만들며 손은 더 아래로 향한다. 블랙의 눈과 같은 색의 분홍빛 보석으로 장식한 피어싱이 달린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문지르거나 당기다 보면 바지를 벗는 움직임에 맞춰 발기한 성기를 허벅지에 부비고, 곧 몸이 완전히 겹쳐지면 한동안 집에서는 신음과 둘의 숨소리가 얽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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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담요로 둘둘 말아둔 블랙을 의자에 내려놓으며 그렇게 속삭이니, 노곤해진 채 약간은 졸음을 품은 분홍색 눈이 감겼다가 떠지는 걸 한번 보고 나서야 이마에 입을 맞추고 에텔은 몸을 일으켰다. 늦은 저녁이긴 하지만, 배가 고픈 상태로 잠들기보다는 간단한 야식을 먹고 조금 늦게 자고 일어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냉장고를 열어 남은 음식을 확인하면, 딱 주말까지는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양이 남아있었다. 그 이후에는 장을 볼 필요도, 무언갈 섭취할 필요도 없어진다. 나중에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연극 따위를 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때에는 장을 볼 수 있는 마트는 남아있을까? 식료품점은?

“아, 그…. 의식, 말이군요.”

 조금의 망설임, 불안감, 떨리는 목소리. 블랙이 악마가 되는 걸 무서워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악마? 아니, 이건 자신을 위해 날개를 버리고 이 땅에 자신의 옆에 있기로 결정한 자신의 사랑스러운 천사님께 불멸을, 날개를 되돌려주는 의식이었다. 이미 구원받은 자신에게 멸망으로 치달을 이 땅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지만 변화에 맞춰 가만히 있는 건 도태였다. 에텔이 마음먹은 건 진화였고. 날개를 버리고 자신의 곁에 왔는데 다시 날개를 달면 신께 벌을 받을까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이게 악마들에게 배운 의식이기 때문에 더럽혀질 걸 걱정하는 걸까. 하지만 우리의 구세주조차도 타락하여 세계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한 마당에, 악마의 의식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축복이란 이름으로 불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에텔은 블랙에게 대답을 하기보다는 야식 준비를 좀 더 신경 쓰기로 했다. 괜히 먹고 나서 탈이 나면 안 되니까. 아침에 먹다 남은 수프를 데우고, 냉동 생지 상태인 빵을 꺼내 오븐에 넣었다. 이제 간단하다고는 못 부르겠지만 빵과 같이 먹을 샐러드를 만들고 계란과 베이컨까지 구워 식탁에 내려놓았다. 고작 의자라지만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제작 주문한 2인용 의자에 기대어져 있는 블랙의 몸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두렵다면, 절 믿어주세요. 제가 당신을, 천사님을 해칠 리가 없으니까.”

“…네, 믿고 있어요. 에텔.”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에 목소리에서 불안이 사라지고 사랑이 담긴 말을 듣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수건과 담요로 말아둔 틈 사이로 보이는 맨살을 보며 식욕이 돌았다. 당신을 삼켜 제 안에 가두고 싶어요, 블랙.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블랙을 삼킬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연약한 이는 뼈를 부수지 못할 테고, 근육을 찢어내지 못할 테니. “에텔?”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의식에 필요한 남은 제물의 수를 떠올렸다. 정말, 이제,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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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을에 두 개의 심장을 제외하고 모든 심장이 멈췄음에도 다른 마을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게 점점 당연해지는 세계였으니까. 사제 둘이 이사 왔으니 이 혼란한 상황에도 이 마을은 신의 가호를 받으리라 말했던 자의 심장, 돈이 없다며 도둑질을 하려고 했던 자의 심장,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자의 심장, 친절했던 이웃들의 심장, 자신을 노리던 이의 심장…. 선한 주인의 심장이기도 했고 악한 주인의 심장이었던 것들. 이제는 다 의미 없이 제물로 바쳐질 심장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마을의 사제가 주관하던 교회 옆의 작은 식장이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소로 제법 알맞지 않은가 싶어 고른 장소였다. 이곳을 청소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냈다.

 집에서 잠든 그의 몸을 끌어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방해할 이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거리를 지나 교회로 향한다. 그의 머리색을 닮은 하얀 천으로, 눈색을 닮은 분홍빛의 카펫을 밟아 주례가 서는 단상을 치우고 만든 제단에 그를 눕혔다. 노래정도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찬송가만큼은 끝까지 외우질 못했다. 제단에 누운 그의 머리에 웨딩드레스는 없어도, 열심히 고민하면서 고른 면사포를 씌우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수십 개의 심장을 찔러 축성한 칼을 들어 마지막 제물을 꺼낼 차례였다.

 에텔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다. 분명 뼈와 근육으로 찢기 힘들어야 하지만, 이미 의식이 시작되어 마법이 걸린 칼로 인간의 연약한 몸을 가르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가 흐르지만, 흐르는 순간 바로 칼에게 흡수됐다. 진화한 뒤의 몸에는 심장은 불필요했으니까. 칼로 마지막 제물 중 하나를 찌르는 데 성공하면, 다음은 그의 심장이었다. 자신을 믿고 잠든 그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부드럽게 갈라냈다. 뼈와 근육을, 다른 장기들을 조심스럽게 잘라내고 나면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아, 그래도 당신을 끌어안고 듣던 심장소리를 제법 좋아했는데. 이미 심장이 멈춘 몸이지만 손을 통해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자신의 몸에도 이어지는 착각을 느꼈다. 아쉬운 감각을 계속해서, 한계가 올 때까지 느끼고 있다가 결국 칼을 쥔 손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고 그렇게, 이 세상은 악마를 둘 낳았다. 완벽한 천국이 되었다.

 인간에게 이름은 그저, 부모가 지어준 불리기만 할 뿐인 의미는 있어도 존재 자체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든지 불리는 이름을 바꾸고 싶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되었지만 악마에게는, 그 이름이 존재를 의미했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무어라 부를지 에텔은 의식을 처음 시작하던 날부터 계속해서 고민했다. 신께서 그에게 내려준 이름인 라파엘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그의 이름을 천사라 명명할까, 그게 아니라면…. 구원을 위해 신이 보내준 천사가 아님을 안다. 제멋대로 자신이 사랑에 빠져 곁에 머물기를 원했고 당신이 자신에게 사랑을 내어주는 게 자신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아, 나의 악몽이나 다름없던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준 이를 어찌 천사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자신이 불렀을 때 가장 기뻐하던 이름이 있었기에. 결국에 자신이 입에 담은 이름은….

“블레이크, 내 사랑 블랙.”

 여전히 당신은 자신을 구원할 천사일 테고, 악마의 의식을 치렀으나 이것은 축복이라 불릴 테다. 그리고 나는….

“에텔….”

 당신이 불러준 이름으로 영원을 살아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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