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이야기 (CoC 팬시나리오 불사인형/영원마녀 스포일러)
모르포
25-09-03 15:40
1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다리에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제 고통이 마비된 기분이 든다. 차라리 잘려버렸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몸은 쉽게 잘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다. 피를 너무 흘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아파왔다. 아, 진짜 이렇게 허무하게 죽나? 스승님 말이나 들을걸. 괜히 나서보겠다고 나와서는…. 숲에는 사람이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 스승님도 당분간은 들어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게 다 마법사 때문이야. 마법사가 약초를 나눠주러 오니까, 괜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딴 곳까지 들어와서…. 덫을 이렇게 깔아 둔 놈이 누구야? 살아 돌아가면 죽여버리겠어, 살아 돌아가면….
“이런, 덫에 걸렸구나.”
죽음을 앞두고 제 탓만 하다 지쳐 남 탓을 해보며 원망을 쏟아내고 있을 때 숲 깊은 곳에서 걸어오는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얀색의 로브를 두르고 그에 어울리는 하얀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한 사람. 그럼에도 머리카락과 눈 색은 검은 사람. 그래서인지 눈가의 피곤함과 함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여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세상의 끝이라 이름 붙여진 숲 속의 탑에서 살고 잇는 마법사. 처음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든 감정은 …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이 꼴이 되어있으면 다급하게 달려와서 괜찮냐는 이야기를 먼저 건네지 않나?
“사나운 동물이 없어서 작은 동물들만 다니니까 사냥꾼들이 뭐든 잡겠다고 덫을 이곳저곳 잘 숨겨두었단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렴. 아직 배우는 중이잖니, 스승님 말 듣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입술을 뻥긋하는 것조차 힘이 든다. 두려운 감정을 일으킨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희미하게 사라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웃음. 그 사이의 어떠한 그리움. 이 상처를 보고 그리움을 느낄만한 게 있나? 내가 손목을 붙잡아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손으로 덫을 붙잡더니 내가 그렇게 발버둥 친 게 허무해질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덫을 벌려내어 내 다리를 빼내었다. 덫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에 흩날리더니 사라졌다.
“항상 기억하렴. 숲 깊은 곳을 들어오면 안 된다.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을 조심해야 해. 아, 아픈 아이를 두고 내가 말이 많았구나. 미안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두 괜찮을 거란다.”
마법사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오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어떠한 안도, 혹은 더 이상 이 이상의 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본능. 눈을 감으면 얼마 안 있어 의식이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허억, 내, 내 다리…!!”
그 뒤로 눈을 떠보니 나는 스승의 집 침대에 누워있었다. 숲 입구에 쓰러져 있는 걸 마을의 나무꾼이 알려줬고 스승님이 데리러 오셨다고. 다리는 멀쩡하게 나아있었다. 마법사의 이야기를 했더니, 스승님은 감사를 전해야겠구나.라는 말과 함께 괜히 마을에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는 항상 마을에 내려와 약초를 싼값에 팔고 가면서도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어떠한 큰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숲에서만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괜히 말을 꺼내고 다녀 시끄럽게 굴진 않았다.
마법사는 내가 수습을 끝내고 한 사람분의 약초꾼 생활을 하게 될 때까지 이미 나이 든 그 모습에서 더 이상 늙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맙긴 한데, 무섭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혀를 찼다. 마법사님에게 싸게 얻은 약초가 몸에서 간질거리지도 않는 건가. 저번에 우리한테 사갈 때 너무 비싸다고 성질을 내던 이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런 이들이 마법사가 무섭다고 떠드는 꼴이라니.
스승님이 돌아가셨다. 이제 이 마을의 약초꾼은 나 혼자다. 마법사님의 대한 소문은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마법사님의 방문이 뜸해지기 시작하자 기어코 숲의 나무꾼의 실종을 마법사님과 엮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사님이 숲에서 괴물을 기르는 걸 목격했다고. 실종된 사람을 괴물로 바꿔 기르기 시작해서 이제 더 이상 마을에 오지 않는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자 마을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 결국 마을 외곽에 집을 지어 멀어졌다. 이제 마법사님이 오지 않아서 약초 장사는 더 잘 되기 시작했다. 이제 성질조차 내지 못하고 나에게 잔뜩 고개를 숙이며 사간다. 웃긴 놈들이야.
약초를 캐러 숲에 들어가면서 마법사님을 만나러 갈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 숲의 깊은 곳에 닿았을 때 숲의 동물들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숲은 조용하다고들 말하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보면 여기서도 각종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어떤 지점에 딱 발을 딛는 순간 그 소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 빠르게 도망쳐버렸다. 그 안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마법사님 그 안에 계십니까? 이 소문이 진짜라고 한다면 저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민하령 내놔!!!!”
“유이서! 네가 마을 어른들이랑 뭐가 달라!”
“시끄러워! 서도하, 너야 말로 왜 이렇게 침착해? 하령이가 사라졌는데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냐고!”
오랜만에 아주 그리운 꿈을 꾼 듯했다. 최근에 꼬마가 데리고 온 요한이라는 애 때문인가. 꽤 오래 지났음에도 꿈에서라도 마법사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는 걸 기뻐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시끄러운 소리에 깬 뒤로 반응하지 않고 꿈을 다시금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하령이 내놓으라고! 나와! 안 나오면 이, 이 문! 부숴버릴 거야!”
꼬마? 꼬마 이름이 왜 나와. 아까도 꼬마를 찾았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틀에 한번 꼴로 찾아오던 놈이 소식이 없었다. 대충 얼굴을 닦고 문을 열고 나가니 한참 울어 눈이 붓다 못해 빨개진 애랑 같이 울먹이고 있긴 하지만 침착한 척하려는 애 두 명이 보였다.
“꼬마는 여기 안 왔어. 그저께부터 여기 안 왔는데? 찾으려면 잘못 왔다.”
“… 하령이가 여기 안 왔나요? 고양이를 보러 간다고 했는데.”
“어, 고양이랑은 여기서 안 만나고 마을 바깥에서 만난다고 하던데.”
“하령이가, 고양이를 보러 간다고 해놓고 이틀 째 집에 안 들어왔어요.”
“뭐?”
“흐어엉, 민하령 망할 자식 어디 갔는데! 마법사가, 마법사가 잡아먹었나 봐!”
울던 아이는 그대로 더 울기 시작했고 침착한 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하필, 그 꿈을 오늘 꾼 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왜. 이런 날? 꼬마가 사라졌다는 말에 그대로 아이들을 두고 마을로 향했다. 내가 마법사님이 그럴 리 없다고 했을 때 쏟아지던 적대적인 시선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때도 지금도 당연하게 범인은 마법사님으로 만들었다. 내가 나가서 확인해 보겠다고 말을 하자 반대 의견이 돌아왔다. 나도, ‘마법사’에게 홀렸을 수도 있으니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가게 둘 수 없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뒤로 요한이가 와서 꼬마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갔다.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으니 이 집도 한참 동안이나 조용하겠지. 젠장, 벌써 꼬마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애들이 하령이의 실종사건을 언급하는 걸 포기하게 되고 마을의 감시도 조용해졌지만 요한이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이가 말했던 마을에 가서 그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물어봤지만 급하게 멀리 공부를 하러 가는 바람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걸 보았다. 그 사람의 미소는 희미하게 사라질 듯한 미소였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웃음. 모습이 다름에도 어째서 저는 마법사님, 당신이 그 사람에게서 보이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요한이는 정말로 옆마을 사람이 맞았을까? 요한이가 없으면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던 고양이. 옆마을에서 고양이를 봤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었다. 요한이가 없을 땐 고양이를 만나러 숲에 간 꼬마.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알 수 있을까, 그곳에서 꼬마도 요한이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항상 숲의 깊은 곳에서 되돌아 나오기만 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깨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혼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꼬마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에 홀로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옆마을로 이사를 갔다. 숲에서 멀어져 약초꾼 생활이 아닌 다른 일을 배우며 살아갔다. 가끔 미소가 많이 닮은 사람과 마주쳤지만 괜히 마법사님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법사도, 숲도, 꼬마도, 마을도 전부 잊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집에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붉은 머리 꼬마가 아직 보고 싶니? 숲에 가보렴. 여전히 들어가지 못한다면 돌아가고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렴.]
그걸 보자마자 바로 요한이의 아버지라 말하던 이의 집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집’이 없었다. 아무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전부 잊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옷과 짐을 챙기고 급하게 되돌아가 오랜만에 숲에 도착했다. 떨리는 몸을 멈추지 못하면서 오랜만이지만 여전히 익숙한 듯한 숲의 길을 따라 깊은 곳에 도달했다. 아, 두려움이 사라져 있었다. 여전히 소리가 들리는 곳. 나는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곳으로 향했다. 눈앞에 화원이 펼쳐지고 마법사의 탑이 보였다. 외양간의 소들을 지나쳐 탑의 1층 문을 열어보니 고양이와 개를 반반씩 닮은 듯한 동물들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생활한 흔적. 그리고 쉼 없이 계단을 오르다가 4층으로 올라가기 전, 투명한 벽에 막혀 겨우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삐-!”
“흐아악! 헉, 허억, 괴, 괴물? 아니, 아니…! 너, 너, 아니, 아니야…. 거짓말, 이지. 정말로, 마법사님이….”
“삐이.”
하늘을 나는 도마뱀. 붉은색의 가죽과 빛나는 푸른 눈.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드는 모습이 꼬마와 닮아있었다. 아니, 분명 꼬마일 텐데. 지금껏 부정해 온 사실이 정말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그곳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음을 쏟아냈다. 마법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꼴사납게 우는 동안에 도마뱀은 옆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기만 했다.
마법사님과 요한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제 이 숲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된 걸까. 왜 그런 편지를 남긴 걸까. 4층에는 왜 올라가지 못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는 내가 알고 있는 게 많았던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휘말린 사람이었을 뿐인데.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어느 등장인물이었겠지. 이것은 누군가 잊힐 이야기가 아쉬워 적어낸 외전에 불과할 거다. 영원히 이야기의 진상을 알지 못하겠지만, 알아서는 안 되고 그저 이대로 살아가야 하겠지.
“꼬마야.”
“삐이-!”
“나랑 살자. 이제는 혼자는 싫으니까.”
“삐이이.”
귓가에 ‘대장!’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목소리만큼은 잊지 못했다. 마법사님,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하시길. 당신과 요한이의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을 맺길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이 제 이야기의 결말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신 것처럼.
세상에 끝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어떤 이야기보다는 짧게 끝맺어질 이야기지만, 행복한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이야기가.
“이런, 덫에 걸렸구나.”
죽음을 앞두고 제 탓만 하다 지쳐 남 탓을 해보며 원망을 쏟아내고 있을 때 숲 깊은 곳에서 걸어오는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얀색의 로브를 두르고 그에 어울리는 하얀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한 사람. 그럼에도 머리카락과 눈 색은 검은 사람. 그래서인지 눈가의 피곤함과 함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여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세상의 끝이라 이름 붙여진 숲 속의 탑에서 살고 잇는 마법사. 처음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든 감정은 …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이 꼴이 되어있으면 다급하게 달려와서 괜찮냐는 이야기를 먼저 건네지 않나?
“사나운 동물이 없어서 작은 동물들만 다니니까 사냥꾼들이 뭐든 잡겠다고 덫을 이곳저곳 잘 숨겨두었단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렴. 아직 배우는 중이잖니, 스승님 말 듣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입술을 뻥긋하는 것조차 힘이 든다. 두려운 감정을 일으킨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희미하게 사라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웃음. 그 사이의 어떠한 그리움. 이 상처를 보고 그리움을 느낄만한 게 있나? 내가 손목을 붙잡아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손으로 덫을 붙잡더니 내가 그렇게 발버둥 친 게 허무해질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덫을 벌려내어 내 다리를 빼내었다. 덫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에 흩날리더니 사라졌다.
“항상 기억하렴. 숲 깊은 곳을 들어오면 안 된다.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을 조심해야 해. 아, 아픈 아이를 두고 내가 말이 많았구나. 미안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두 괜찮을 거란다.”
마법사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오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어떠한 안도, 혹은 더 이상 이 이상의 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본능. 눈을 감으면 얼마 안 있어 의식이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허억, 내, 내 다리…!!”
그 뒤로 눈을 떠보니 나는 스승의 집 침대에 누워있었다. 숲 입구에 쓰러져 있는 걸 마을의 나무꾼이 알려줬고 스승님이 데리러 오셨다고. 다리는 멀쩡하게 나아있었다. 마법사의 이야기를 했더니, 스승님은 감사를 전해야겠구나.라는 말과 함께 괜히 마을에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는 항상 마을에 내려와 약초를 싼값에 팔고 가면서도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어떠한 큰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숲에서만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괜히 말을 꺼내고 다녀 시끄럽게 굴진 않았다.
마법사는 내가 수습을 끝내고 한 사람분의 약초꾼 생활을 하게 될 때까지 이미 나이 든 그 모습에서 더 이상 늙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맙긴 한데, 무섭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혀를 찼다. 마법사님에게 싸게 얻은 약초가 몸에서 간질거리지도 않는 건가. 저번에 우리한테 사갈 때 너무 비싸다고 성질을 내던 이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런 이들이 마법사가 무섭다고 떠드는 꼴이라니.
스승님이 돌아가셨다. 이제 이 마을의 약초꾼은 나 혼자다. 마법사님의 대한 소문은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마법사님의 방문이 뜸해지기 시작하자 기어코 숲의 나무꾼의 실종을 마법사님과 엮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사님이 숲에서 괴물을 기르는 걸 목격했다고. 실종된 사람을 괴물로 바꿔 기르기 시작해서 이제 더 이상 마을에 오지 않는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자 마을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 결국 마을 외곽에 집을 지어 멀어졌다. 이제 마법사님이 오지 않아서 약초 장사는 더 잘 되기 시작했다. 이제 성질조차 내지 못하고 나에게 잔뜩 고개를 숙이며 사간다. 웃긴 놈들이야.
약초를 캐러 숲에 들어가면서 마법사님을 만나러 갈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 숲의 깊은 곳에 닿았을 때 숲의 동물들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숲은 조용하다고들 말하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보면 여기서도 각종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어떤 지점에 딱 발을 딛는 순간 그 소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 빠르게 도망쳐버렸다. 그 안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마법사님 그 안에 계십니까? 이 소문이 진짜라고 한다면 저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민하령 내놔!!!!”
“유이서! 네가 마을 어른들이랑 뭐가 달라!”
“시끄러워! 서도하, 너야 말로 왜 이렇게 침착해? 하령이가 사라졌는데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냐고!”
오랜만에 아주 그리운 꿈을 꾼 듯했다. 최근에 꼬마가 데리고 온 요한이라는 애 때문인가. 꽤 오래 지났음에도 꿈에서라도 마법사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는 걸 기뻐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시끄러운 소리에 깬 뒤로 반응하지 않고 꿈을 다시금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하령이 내놓으라고! 나와! 안 나오면 이, 이 문! 부숴버릴 거야!”
꼬마? 꼬마 이름이 왜 나와. 아까도 꼬마를 찾았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틀에 한번 꼴로 찾아오던 놈이 소식이 없었다. 대충 얼굴을 닦고 문을 열고 나가니 한참 울어 눈이 붓다 못해 빨개진 애랑 같이 울먹이고 있긴 하지만 침착한 척하려는 애 두 명이 보였다.
“꼬마는 여기 안 왔어. 그저께부터 여기 안 왔는데? 찾으려면 잘못 왔다.”
“… 하령이가 여기 안 왔나요? 고양이를 보러 간다고 했는데.”
“어, 고양이랑은 여기서 안 만나고 마을 바깥에서 만난다고 하던데.”
“하령이가, 고양이를 보러 간다고 해놓고 이틀 째 집에 안 들어왔어요.”
“뭐?”
“흐어엉, 민하령 망할 자식 어디 갔는데! 마법사가, 마법사가 잡아먹었나 봐!”
울던 아이는 그대로 더 울기 시작했고 침착한 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하필, 그 꿈을 오늘 꾼 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왜. 이런 날? 꼬마가 사라졌다는 말에 그대로 아이들을 두고 마을로 향했다. 내가 마법사님이 그럴 리 없다고 했을 때 쏟아지던 적대적인 시선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때도 지금도 당연하게 범인은 마법사님으로 만들었다. 내가 나가서 확인해 보겠다고 말을 하자 반대 의견이 돌아왔다. 나도, ‘마법사’에게 홀렸을 수도 있으니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가게 둘 수 없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뒤로 요한이가 와서 꼬마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갔다.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으니 이 집도 한참 동안이나 조용하겠지. 젠장, 벌써 꼬마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애들이 하령이의 실종사건을 언급하는 걸 포기하게 되고 마을의 감시도 조용해졌지만 요한이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이가 말했던 마을에 가서 그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물어봤지만 급하게 멀리 공부를 하러 가는 바람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걸 보았다. 그 사람의 미소는 희미하게 사라질 듯한 미소였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웃음. 모습이 다름에도 어째서 저는 마법사님, 당신이 그 사람에게서 보이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요한이는 정말로 옆마을 사람이 맞았을까? 요한이가 없으면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던 고양이. 옆마을에서 고양이를 봤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었다. 요한이가 없을 땐 고양이를 만나러 숲에 간 꼬마.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알 수 있을까, 그곳에서 꼬마도 요한이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항상 숲의 깊은 곳에서 되돌아 나오기만 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깨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혼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꼬마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에 홀로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옆마을로 이사를 갔다. 숲에서 멀어져 약초꾼 생활이 아닌 다른 일을 배우며 살아갔다. 가끔 미소가 많이 닮은 사람과 마주쳤지만 괜히 마법사님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법사도, 숲도, 꼬마도, 마을도 전부 잊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집에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붉은 머리 꼬마가 아직 보고 싶니? 숲에 가보렴. 여전히 들어가지 못한다면 돌아가고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렴.]
그걸 보자마자 바로 요한이의 아버지라 말하던 이의 집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집’이 없었다. 아무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전부 잊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옷과 짐을 챙기고 급하게 되돌아가 오랜만에 숲에 도착했다. 떨리는 몸을 멈추지 못하면서 오랜만이지만 여전히 익숙한 듯한 숲의 길을 따라 깊은 곳에 도달했다. 아, 두려움이 사라져 있었다. 여전히 소리가 들리는 곳. 나는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곳으로 향했다. 눈앞에 화원이 펼쳐지고 마법사의 탑이 보였다. 외양간의 소들을 지나쳐 탑의 1층 문을 열어보니 고양이와 개를 반반씩 닮은 듯한 동물들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생활한 흔적. 그리고 쉼 없이 계단을 오르다가 4층으로 올라가기 전, 투명한 벽에 막혀 겨우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삐-!”
“흐아악! 헉, 허억, 괴, 괴물? 아니, 아니…! 너, 너, 아니, 아니야…. 거짓말, 이지. 정말로, 마법사님이….”
“삐이.”
하늘을 나는 도마뱀. 붉은색의 가죽과 빛나는 푸른 눈.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드는 모습이 꼬마와 닮아있었다. 아니, 분명 꼬마일 텐데. 지금껏 부정해 온 사실이 정말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그곳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음을 쏟아냈다. 마법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꼴사납게 우는 동안에 도마뱀은 옆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기만 했다.
마법사님과 요한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제 이 숲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된 걸까. 왜 그런 편지를 남긴 걸까. 4층에는 왜 올라가지 못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는 내가 알고 있는 게 많았던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휘말린 사람이었을 뿐인데.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어느 등장인물이었겠지. 이것은 누군가 잊힐 이야기가 아쉬워 적어낸 외전에 불과할 거다. 영원히 이야기의 진상을 알지 못하겠지만, 알아서는 안 되고 그저 이대로 살아가야 하겠지.
“꼬마야.”
“삐이-!”
“나랑 살자. 이제는 혼자는 싫으니까.”
“삐이이.”
귓가에 ‘대장!’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목소리만큼은 잊지 못했다. 마법사님,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하시길. 당신과 요한이의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을 맺길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이 제 이야기의 결말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신 것처럼.
세상에 끝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어떤 이야기보다는 짧게 끝맺어질 이야기지만, 행복한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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