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 금기를 깬 자의 말로란
모르포
25-09-03 16:46
2
그 말로를 보지 못한 이들이 비참하다고 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시야 이웰은 즐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인간을 버렸다. 인간의 짧은 생으로는 충분한 재미를 못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즐거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분노, 그러니까 부정적인 감정이었으니까 인간으로 있어서 나약한 몸으로 도발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적이 되어, 사냥꾼의 모습으로 즐기기로 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커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으면 모를까, 충분히 뱀파이어에게 들키지 않는 산맥 근처의 적당히 잘 사는 농사로 배 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을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던 시야는 생각했다. 인간 중에도 뱀파이어가 될 이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신 바네는 사실 외로운 게 아니라 두 종족의 대립을 즐기고 있다. 가 시야의 생각이었다. 그다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결국 이렇게 말한다면 뱀파이어도 인간도 그의 창조물이며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시야 이웰은, 그렇게 자신의 성을 바꾸어 웨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뱀파이어가 된 그날의 자신을 잊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몸의 시간을 멈췄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백발은 축복받아 변한 잿빛 피부에 어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웨르는 만족했다. 첫 사냥을 하면서 결국 우여곡절 끝에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파란 눈과 어울려 즐거워했다. 그 뒤 처음으로 세운 목표는 여행이었고, 웨르는 그대로 북쪽을 말 그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벗어나는 일은 정말 한정적이었고 죽을 때까지 농사만 하다가 죽을 운명이었을 웨르는 스스로 자신의 발로 걸어 다니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니까, 웨르의 삶을 이어가게 해 준 재미는 인간의 분노였으나 그 외로 뱀파이어가 되면서 하나둘씩 다른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래서 뱀파이어가 된 것은 웨르에게 큰 축복일 수밖에 없었다.
협정에 참여한 것도 재미에 기반한 것이었다. 물론 직계이신 주군께서 오신다는 것에 흥미를 안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뱀파이어와 같이 지내는 자리! 평화의 시대가 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애초에 요즘 인간 사냥이 힘들었기도 하고, 먹이가 모여있는 뷔페지 않나. 웨르는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
협정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도 며칠이 지났지? 생각보다 헌터들은 재미있는 이들이 많았다. 애초에 서로 경계하고 화합의 장을 제대로 펼치고 있다 보니 그렇게 날을 세우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게 웨르에게는 조금의 불만이었으나 무조건 죽는 건 불가능하다는 ‘조건’ 하에 고통을 즐기는 행동들이 가능했으니 재미를 못 느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웨르도 조금 꿈꿔봤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시라도 이 평화를 기억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까지만 지속되는 평화를, 그 이후에 인간들이 전부 죽더라도 잠깐의 평화를.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지 못해 평화를 바란 거겠지.
물론 평화는 깨졌다. 인간과 뱀파이어는 서로 너무나 닮았지만, 신의 장난인지 너무나 달랐기에. 사냥꾼과 먹이의 관계가 과연 변하겠는가? 평화라는 것은 이긴자들이 허울 좋게 붙인 이름일 뿐인데.
결국 여전히 죽이지 않는다, 는 유효했으나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웨르는 자신이 꿈꿨던 게 얼마나 허망하고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떠올렸다. 아, 자신의 즐거움은 누군가의 분노가 아니었던가? 싸움이 시작되자 이곳저곳에서 인간들이 품는 분노가 제게 느껴졌다. 종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드디어 계속해서 느낀 무언가가 뭔지 알 수 있었다. 퍼즐 조각이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저는 이런 걸 보기 위해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는가. 웨르는 기뻤다. 이 싸움에서 동족을 걱정하는 척, 싸우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더욱더 자신에게 구경거리가 많아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표정을 보면서 한참이고 즐기고, 즐기다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의 표정을 우연히 보게 됐다. 아니, 지금껏 보았지만 스스로 거부했던 걸지도 모른다. 웨르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동족이다. 동족의 피를 탐하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동족의 분노를 탐하는 것도 결국은 똑같은 금기가 아닌가?
아, 자신이 동경하던 아름다운 얼굴로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인간의 분노는 짧은 생에서 이루어진 분노도 있지만 보통 그것을 이루지 못해 후손에게 이어가게 만드느라 세뇌로 이루어진 혐오와 분노도 있었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이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다면 저절로 반대편의 적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오로지 자기 생각으로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분명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 먹이 정도의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이 보인다면? 같은 뱀파이어가 다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 아닌, 그것과 다른 감정을 보인다면! 웨르에게는 인간의 분노보다 더욱 값진 감정이 되었다. 그리고 보고 싶어졌다. 동족이 자신에게 분노하는 모습을. 이백 년간 탐했던 인간의 분노가 아닌 새로운 분노, 즐거움을 즐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성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직계에 순혈까지 있는 곳에서 재미를 원한다면 분명 죽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숨을 죽이고 인간의 감정을 즐기는 것처럼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협정은 끝이 났고 결국 처음과 달라진 것은 하나 없었다. 고성에서 혐정이 끝난 뒤에 보자고 했지만 정작 웨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고성에서의 편안함을 알아버렸고 아무리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고성에서 지낸 기간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었기에. 고성에서 본 이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싸움을 시작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웨르는 그들을 잊기로 했다. 북쪽으로 돌아가서 모든 걸 포기하고 잠들기로 했다. 동족은 분명 조금 자고 일어난다고 해도 헌터에게 죽지 않는 이상은 살아 있을 테고 헌터는 결국 나약한 인간의 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그래서 결국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차라리 금기를 깨 죽는 것보다는 네게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이 확정된 싸움을 찾고 싶진 않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건 도망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걸 잊고 숨어서 잠들기로 했다.
이미 온기에 길든 짐승이 다시 한기를 찾아 맹수가 될 수 있을까?
웨르는 그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동굴도 나무 위도 땅바닥도 아닌 웨르가 잠을 잘 곳으로 선택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죽은 뱀파이어가 살고 있었을 법한 고성이었다. 처음 여행하기 시작할 때 발견했던 곳이었으나 협정이 끝난 뒤 웨르가 다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먼지 쌓이고 아무도 없었기에, 잠을 자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불이 켜지지 않아 아주 어둡고 나무로 둘러싸여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 고성의 삐그덕 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 들고 온 담요를 두 개 깔고 웨르는 그 위에 누웠다. 시간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자고 일어나면 온기가 전부 사라졌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웨르는 눈을 떴다.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 몰랐지만 오래 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바깥으로 나가 잠들기 전에 알아뒀던 토끼굴에서 오랜만의 허기를 채웠다. 여전히 북쪽은 추웠으며 낮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아 바네의 심술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간과의 전쟁이 시작됐을까, 아니면 인간이 벌써 죽었을까.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기지개를 켜고 고성을 중심으로 천천히 주위를 탐색했다. 인간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뱀파이어가 이곳에 자리 잡았는지. 여전히 고성 주위는 아무도 없었고 웨르는 결국 몇 년을 자고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담요를 챙겨 들고, 기억하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밤에만 이동하며 다시 사냥하는 법을 떠올렸다.
여전히 시간과 날짜 감각은 남아있지 않아 낮에도 자지 않고 햇빛에서 피해 기억을 더듬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최대한 빨리 산맥을 내려와 남쪽을 바라보면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오래 잠든 게 아닌 건가 싶어 안타까워할 때, 비명이 들렸다. 웨르는 그것에 반응해 그쪽으로 조심히 달려갔다. 그리고 보인 것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대치 상황. 뱀파이어가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죽을 것 같은, 그리고 그 뱀파이어의 표정은, 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웨르의 즐거움은 여전했다. 아니, 이번에는 참을 수 없는 광기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금기를 이미 깨버린 자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능력으로 인간을 기습해 익사시킨 뒤, 감사 인사를 하는 뱀파이어를 보며 헌터의 은제 검을 들고 가슴에 칼을 꽂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뱀파이어를 바라보며 웨르는 몇 번이고 가슴을 칼로 난도질했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피와 점차 분노에 차 자신을 보며 소리치는 뱀파이어, 결국에는 눈에서 빛이 사라질 때까지. 하얀 셔츠와 잿빛 피부, 그리고 하얀 머리카락에 피가 묻었다. 인간도 아니고, 뱀파이어의 피를! 제게 축복을 내린 자들의 피가! 비명이 가득 찼던 그 자리에서 웃음이 가득 터져 나왔다. 피는 탐하지 않았지만, 동족의 목숨을 탐하는 것은, 동족의 분노 어린 얼굴을, 표정을 탐하는 것은 과연 금기인 걸까? 이렇게나 멀쩡히 살아있는데!
북쪽에서는 그런 소문이 잠깐 돌았다. 잿빛 피부의 뱀파이어가 금기를 깨고 동족을 죽이러 다닌다, 라는... 하지만 그 소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정말 헛소문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금기를 깬 뱀파이어의 결말은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야 이웰은 즐거움으로 죽었고, 웨르는 즐거움으로 탄생했으며, 또다시 즐거움으로 죽었다.
금기를 깬 자의 말로를 비참하다고 하는 것은 그 말로를 지켜보지 못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시야 이웰은 즐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인간을 버렸다. 인간의 짧은 생으로는 충분한 재미를 못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즐거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분노, 그러니까 부정적인 감정이었으니까 인간으로 있어서 나약한 몸으로 도발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적이 되어, 사냥꾼의 모습으로 즐기기로 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커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으면 모를까, 충분히 뱀파이어에게 들키지 않는 산맥 근처의 적당히 잘 사는 농사로 배 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을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던 시야는 생각했다. 인간 중에도 뱀파이어가 될 이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신 바네는 사실 외로운 게 아니라 두 종족의 대립을 즐기고 있다. 가 시야의 생각이었다. 그다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결국 이렇게 말한다면 뱀파이어도 인간도 그의 창조물이며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시야 이웰은, 그렇게 자신의 성을 바꾸어 웨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뱀파이어가 된 그날의 자신을 잊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몸의 시간을 멈췄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백발은 축복받아 변한 잿빛 피부에 어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웨르는 만족했다. 첫 사냥을 하면서 결국 우여곡절 끝에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파란 눈과 어울려 즐거워했다. 그 뒤 처음으로 세운 목표는 여행이었고, 웨르는 그대로 북쪽을 말 그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벗어나는 일은 정말 한정적이었고 죽을 때까지 농사만 하다가 죽을 운명이었을 웨르는 스스로 자신의 발로 걸어 다니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니까, 웨르의 삶을 이어가게 해 준 재미는 인간의 분노였으나 그 외로 뱀파이어가 되면서 하나둘씩 다른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래서 뱀파이어가 된 것은 웨르에게 큰 축복일 수밖에 없었다.
협정에 참여한 것도 재미에 기반한 것이었다. 물론 직계이신 주군께서 오신다는 것에 흥미를 안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뱀파이어와 같이 지내는 자리! 평화의 시대가 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애초에 요즘 인간 사냥이 힘들었기도 하고, 먹이가 모여있는 뷔페지 않나. 웨르는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
협정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도 며칠이 지났지? 생각보다 헌터들은 재미있는 이들이 많았다. 애초에 서로 경계하고 화합의 장을 제대로 펼치고 있다 보니 그렇게 날을 세우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게 웨르에게는 조금의 불만이었으나 무조건 죽는 건 불가능하다는 ‘조건’ 하에 고통을 즐기는 행동들이 가능했으니 재미를 못 느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웨르도 조금 꿈꿔봤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시라도 이 평화를 기억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까지만 지속되는 평화를, 그 이후에 인간들이 전부 죽더라도 잠깐의 평화를.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지 못해 평화를 바란 거겠지.
물론 평화는 깨졌다. 인간과 뱀파이어는 서로 너무나 닮았지만, 신의 장난인지 너무나 달랐기에. 사냥꾼과 먹이의 관계가 과연 변하겠는가? 평화라는 것은 이긴자들이 허울 좋게 붙인 이름일 뿐인데.
결국 여전히 죽이지 않는다, 는 유효했으나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웨르는 자신이 꿈꿨던 게 얼마나 허망하고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떠올렸다. 아, 자신의 즐거움은 누군가의 분노가 아니었던가? 싸움이 시작되자 이곳저곳에서 인간들이 품는 분노가 제게 느껴졌다. 종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드디어 계속해서 느낀 무언가가 뭔지 알 수 있었다. 퍼즐 조각이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저는 이런 걸 보기 위해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는가. 웨르는 기뻤다. 이 싸움에서 동족을 걱정하는 척, 싸우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더욱더 자신에게 구경거리가 많아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표정을 보면서 한참이고 즐기고, 즐기다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의 표정을 우연히 보게 됐다. 아니, 지금껏 보았지만 스스로 거부했던 걸지도 모른다. 웨르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동족이다. 동족의 피를 탐하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동족의 분노를 탐하는 것도 결국은 똑같은 금기가 아닌가?
아, 자신이 동경하던 아름다운 얼굴로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인간의 분노는 짧은 생에서 이루어진 분노도 있지만 보통 그것을 이루지 못해 후손에게 이어가게 만드느라 세뇌로 이루어진 혐오와 분노도 있었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이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다면 저절로 반대편의 적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오로지 자기 생각으로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분명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 먹이 정도의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이 보인다면? 같은 뱀파이어가 다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 아닌, 그것과 다른 감정을 보인다면! 웨르에게는 인간의 분노보다 더욱 값진 감정이 되었다. 그리고 보고 싶어졌다. 동족이 자신에게 분노하는 모습을. 이백 년간 탐했던 인간의 분노가 아닌 새로운 분노, 즐거움을 즐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성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직계에 순혈까지 있는 곳에서 재미를 원한다면 분명 죽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숨을 죽이고 인간의 감정을 즐기는 것처럼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협정은 끝이 났고 결국 처음과 달라진 것은 하나 없었다. 고성에서 혐정이 끝난 뒤에 보자고 했지만 정작 웨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고성에서의 편안함을 알아버렸고 아무리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고성에서 지낸 기간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었기에. 고성에서 본 이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싸움을 시작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웨르는 그들을 잊기로 했다. 북쪽으로 돌아가서 모든 걸 포기하고 잠들기로 했다. 동족은 분명 조금 자고 일어난다고 해도 헌터에게 죽지 않는 이상은 살아 있을 테고 헌터는 결국 나약한 인간의 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그래서 결국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차라리 금기를 깨 죽는 것보다는 네게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이 확정된 싸움을 찾고 싶진 않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건 도망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걸 잊고 숨어서 잠들기로 했다.
이미 온기에 길든 짐승이 다시 한기를 찾아 맹수가 될 수 있을까?
웨르는 그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동굴도 나무 위도 땅바닥도 아닌 웨르가 잠을 잘 곳으로 선택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죽은 뱀파이어가 살고 있었을 법한 고성이었다. 처음 여행하기 시작할 때 발견했던 곳이었으나 협정이 끝난 뒤 웨르가 다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먼지 쌓이고 아무도 없었기에, 잠을 자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불이 켜지지 않아 아주 어둡고 나무로 둘러싸여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 고성의 삐그덕 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 들고 온 담요를 두 개 깔고 웨르는 그 위에 누웠다. 시간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자고 일어나면 온기가 전부 사라졌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웨르는 눈을 떴다.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 몰랐지만 오래 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바깥으로 나가 잠들기 전에 알아뒀던 토끼굴에서 오랜만의 허기를 채웠다. 여전히 북쪽은 추웠으며 낮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아 바네의 심술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간과의 전쟁이 시작됐을까, 아니면 인간이 벌써 죽었을까.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기지개를 켜고 고성을 중심으로 천천히 주위를 탐색했다. 인간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뱀파이어가 이곳에 자리 잡았는지. 여전히 고성 주위는 아무도 없었고 웨르는 결국 몇 년을 자고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담요를 챙겨 들고, 기억하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밤에만 이동하며 다시 사냥하는 법을 떠올렸다.
여전히 시간과 날짜 감각은 남아있지 않아 낮에도 자지 않고 햇빛에서 피해 기억을 더듬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최대한 빨리 산맥을 내려와 남쪽을 바라보면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오래 잠든 게 아닌 건가 싶어 안타까워할 때, 비명이 들렸다. 웨르는 그것에 반응해 그쪽으로 조심히 달려갔다. 그리고 보인 것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대치 상황. 뱀파이어가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죽을 것 같은, 그리고 그 뱀파이어의 표정은, 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웨르의 즐거움은 여전했다. 아니, 이번에는 참을 수 없는 광기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금기를 이미 깨버린 자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능력으로 인간을 기습해 익사시킨 뒤, 감사 인사를 하는 뱀파이어를 보며 헌터의 은제 검을 들고 가슴에 칼을 꽂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뱀파이어를 바라보며 웨르는 몇 번이고 가슴을 칼로 난도질했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피와 점차 분노에 차 자신을 보며 소리치는 뱀파이어, 결국에는 눈에서 빛이 사라질 때까지. 하얀 셔츠와 잿빛 피부, 그리고 하얀 머리카락에 피가 묻었다. 인간도 아니고, 뱀파이어의 피를! 제게 축복을 내린 자들의 피가! 비명이 가득 찼던 그 자리에서 웃음이 가득 터져 나왔다. 피는 탐하지 않았지만, 동족의 목숨을 탐하는 것은, 동족의 분노 어린 얼굴을, 표정을 탐하는 것은 과연 금기인 걸까? 이렇게나 멀쩡히 살아있는데!
북쪽에서는 그런 소문이 잠깐 돌았다. 잿빛 피부의 뱀파이어가 금기를 깨고 동족을 죽이러 다닌다, 라는... 하지만 그 소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정말 헛소문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금기를 깬 뱀파이어의 결말은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야 이웰은 즐거움으로 죽었고, 웨르는 즐거움으로 탄생했으며, 또다시 즐거움으로 죽었다.
금기를 깬 자의 말로를 비참하다고 하는 것은 그 말로를 지켜보지 못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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