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묵] 생각의 끝
모르포 25-09-03 17:17 3
꽤 빠르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건물 바깥을 나서니 해가 지다 못해 깜깜해진 하늘이 체묵의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이 불어 몸이 떨리면 허탈한 숨이 빠져나와 급격하게 식어갔다. 나올 때 딱히 늦는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항상 똑같은 곳에서 저를 기다릴 이가 떠올랐지만 순식간에 이동하는 마법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에 얌전히 비서가 열어준 차 문안으로 들어가 뒷좌석에 자리 잡았다. 한기를 빠르게 녹이는 한참 전부터 틀어져 있을 히터의 온기에 떨리던 몸은 노곤해졌고 늦은 시간이라 피곤한 몸에 잠기운이 몰려왔지만 눈을 비비는 것으로 억지로 몰아냈다. 그래도 하나 마음에 드는 점은 차가 굴러가는 소리 외에는 고요하다는 점이었을까.



 사업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대충 놀기만 했던 도련님은 사업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서였기도 했고, 그것이 지금 체묵의 집안에서 돈이 제일 잘 벌리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 후자가 조금 더 맞는 말일지도. 인어를 판매하는 일은 작은 약국에서 시작한 그의 부모님을 부자로 만들어 준 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인맥을, 돈을 만들어주었고 그 덕분에 부수입으로 벌고 있는 약제 사업도 잘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음 기업의 후계 자리를 맡고 있는 도련님이 와서 "없애."라고 말해도 바로 사라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체묵이 그렇게 바보같이 굴진 않았고 임원을 떠봤을 뿐이다. 기겁하는 얼굴이 돌아왔지만. 후계 자리도 위태로운 마당에 그냥 돈만 받고 떨어져 나갈까. 지금까지처럼.

 체묵은 자신의 작은 바다에 가둔 인어를 비밀로 하고 있지만 종종 아는 사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항상 인간 고기를 먹기 위해서 사업장을 기웃거리고, 경매에서 떨어진 것들을 한데 모아 폭력을 휘두르고 성욕을 풀었던 그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다녀오던 휴가를 어느 순간부터 짧게 자주 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현장에 오지 않더니 일찍 퇴근해서 새로 지은 건물에 가더라. 그곳에는 아주 커다란 수조가 있고, 그 안에는 하얀 눈 같은 것이 있다는 소문. 아무리 돈으로, 폭력으로, 협박으로 입을 다물게 해도 인간은 입을 열게 되어있으니 소문은 꽤 빠르게 주위로 번져나갔다. 그 소문이 체묵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데에는 정말 하루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물론 아무리 노는 걸 좋아하는 도련님이라고 해도 그를 믿고 따르는 유능한 비서라던가 아랫사람들이 빠르게 전달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 소문을 들은 날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하고 머리를 짚은 채 일찍 퇴근해버리기까지 했으니 소문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겠지.

기업이고 사업이고 돈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도망쳐서 어디 한적한 섬에 율과 함께 가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보자는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도 금방 포기했다. 도련님의 삶을 포기할 수 있을리가 있나, 태어날 때부터 이 혜택을 즐기고 살았던 이가. 흔한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모든 걸 놓아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소설일 거야.


 아까는 시끄러워서 그렇게 머리가 아프더니 고요한 지금은 별생각을 다 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체묵의 늘어지는 생각의 끝에 닿은 건 율이었다. 율, 제가 데리고 온 인어. 앞에 했던 생각들이 바로 사라져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차창에 비치는 슬슬 색이 빠져 언뜻 검게 보이는 제 머리카락의 색과 반대되는 색을 가진 내 사랑. 마법처럼 놀랍게도, 율의 생각을 했더니 비서의 도착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따뜻한 차 안에서 나와 재차 한기를 느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최소한의 밝기만을 유지하고 있는 복도를 따라 걸어 제일 보고 싶었던 장소에 도달했다. 바다를 흉내 내려 했으나 그 조금도 닮지 못한 곳, 그럼에도 제가 작은 바다라 이름 붙이고 바다에 사는 이를 데리고 온.



"율."

 투명한 바다 물의 안에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흩날렸으며, 감긴 채 숨어있던 회색의 눈동자가 곧 제게로 이동했다. 이대로 영원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 알겠다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몇 번을 봐도 만족스러운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면 얼굴은 금방 환하게 펴지고, 발걸음은 빠르게 수조로 향했다. 나의 인어, 나만이 소유하고 나만이... 내 사랑.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 있음에도 널 보며 항상 벅차오르는 마음을 넌 알고 있을까. 앞으로 마주하는 게 몇 년이 지나야 괜찮아질는지. 수조의 가까이 붙어 회색의 눈을,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걱정하듯 톡톡, 유리벽을 건드리는 모습에 눈을 휘어 웃어주고는 언젠가 둘이서 맞췄던 수신호로 위로 올라와달라 말하면 물속에서 한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수조의 위로 헤엄쳐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오늘 늦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오늘은 뭐하고 지냈는지, 내 생각은 얼마나 했는지, 물에 젖은 몸을 끌어안고 잔뜩 어리광을 부리면서. 그러고, 마지막에는 사랑한다고 속삭일 테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와는 마주하지 못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사랑한다며 속삭여주겠지. 그럼 하루는 또 행복하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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